용신자(龍信者) 下 by 제녹

"끔찍하구먼."

머리가 날아간 드렉의 시신을 본 훔볼트의 감상이었다. 오른쪽 눈알은 반쯤 으깨져서 시신경에 매달린채 안좌 밖으로 튀어나와 대롱거리며 유리체를 쏟아냈고 왼쪽 눈알은 사라져 보이지도 않았다.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은 드렉의 뒤편은 흩뿌려진 피와 뇌수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훔볼트는 눈쌀을 찌푸리며 드렉의 입안에 박혀있는 총신과 방아쇠를 잡은 채 굳어있는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더니 젖은 수건으로 손을 벅벅 문질렀다.

"입에 총을 물고선 그대로 쏴버린 것 같네. 주저한 흔적도 보이질 않아. 전재산을 사기당한게 그리 억울했던가? 허나… 허나, 그럼 저건 대체 뭐냔 말일세."

훔볼트는 주름진 볼을 푸들거리며 드렉의 머리맡에 놓인 거대한 알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심정은 훔볼트가 느끼는 감정과 거의 동일했다. 이제는 거의 장정의 몸통만큼 자란 알은 총구가 향한 방향으로 드렉의 머리와 일직선을 이루고 있었다. 당연히 알에도 상당량의 '파편'과 탄흔이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건… 깨끗하잖아."

알은 육 일 전과 마찬가지로 붉게, 푸르게, 검게, 희게, 선명하게, 칙칙하게, 밟게, 어둡게, 일렁이며, 잔잔하게 빛나는 비늘들로 덮여있었으며 또한 조용히 맥동하고 있었다. 잠든 사람처럼 느릿하고 고요하게 부풀었다가, 다시 줄어듦에 따라 비늘이 쓸리며 챠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총탄의 흔적도, 혈육의 조각도 없었다.

"먹힌거야."

드렉의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했으며, 그 뒤로 지금껏 아무런 말도 없이 망연한 표정으로 드렉의 맞은편 의자에 주저앉아있던 랜더슨이었다. 그의 나직한 말에 훔볼트의 뒷편에서 눈쌀을 찌푸린채 팔짱을 끼고있던 퀜타른이 물었다.

"다시 말해주겠소?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먹힌거라 들었다면 옳게 들은게 맞소. 드렉은 저 알에 먹힌거요. 하하, 제길. 어제 눈치챘어야 했어. 드렉이 고작 사나흘 굶었다고 말라비틀어질 놈이 아닌데. 거기 팔뚝에 상처 보이시오? 그거 사냥하다 다친게 아니오. 멍청한 놈이 저 빌어먹을 알에 자기 피를 먹인거요. 어쩌다 우연히 알았겠지. 쓰다듬다가 비늘에라도 긁혀서 피가 난걸 저 알이 먹으니까, 잔뜩 흥분해서 피를 더 뿌렸겠지. 그리 하다가 성에 안차서 제 팔을 그어서 쏟아붓고… 종내에는 자기 머리까지 먹인거요. 하하하하하, 제 목숨을 바쳐서! 입에 총을 물고 이렇게, Bang!"

랜더슨은 손가락을 입에 넣고 총을 쏘는 시늉을 하더니 미친듯이 킬킬거리다가, 이내 양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쥐어뜯을 기세로 손을 그러모은 그의 입에서 짐승의 신음소리같은 울음이 새어나왔다. 그어어억, 끄어억, 하는 울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던 랜더슨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저 소리 들었소?"

드렉의 피와 자신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시뻘개진 눈을 한 랜더슨은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그 표정이 워낙 진지했기에 사람들은 웃지 못했다.

"무슨 소리 말인가? 자네 우는 소리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

"조용, 조용히 해 보시오!"

챠륵, 챠르륵, 쿵, 챠르륵, 쿵, 챠륵, 쿵, 챠르르륵…

"……!"

비늘 쓸리는 소리사이에 섞여 들리는 그것은 분명 심박음이었다. 랜더슨은 눈을 희번뜩이며 드렉의 시신에서 총을 뺏어들었다.

쾅!

발사된 산탄은 모조리 알에 틀어박혔다. 그러나 알은 껍질이 깨지며 폭발하지도, 탄환을 튕겨내지도 않았다. 비늘 사이사이로 박힌 탄환은 늪에 빠진 돌덩이처럼 느릿하게 알로 빨려들었다.

쿠왕! 쾅! 쾅! 쾅! 쾅! 철컥! 철컥!

랜더슨은 미친듯 방아쇠를 당겼다. 알은 그를 비웃듯 모든 탄환을 집어삼켰다. 탄환이 떨어진 것을 깨달은 랜더슨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런 그를 퀜타른이 일으켜세워 뒤쪽으로 밀어냈다.

"비켜보시오."

퀜타른은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물러나게 한 뒤 등에 메고 있던 창을 끌러 손에 쥐었다. 창을 들어 잠시 거리를 가늠한 그는 이내 무서운 기세로 발을 딛으며 창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폭음이 터져나왔다. 퀜타른은 손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창이 튕겨났다. 창을 다시 등에 묶어 멘 퀜타른은 미간을 좁히고 알을 살폈다. 총탄을 막아내는 갑옷도 단 일격에 구멍난 고철로 만들어버리는 그의 찌르기에도 알에는 스친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

"이건……."

퀜타른이 막 입을 여는 찰나,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쿠콰콰콰콰콰-!

"무, 무슨 소리지?"

"위요, 하늘에서 들리는 것 같소!"

매사냥꾼 '새매발톱' 이샤프의 외침에 그들은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멍청한 짓이었다. 보이는건 지저분한 천장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쾅! 쾅! 쾅! 콰아앙!

천장을 박살내며 붉고, 푸르고, 검고, 흰 네 명의 사람들이 떨어졌다. 하얗게 드러난 양 팔을 뱀처럼 휘감은 붉은 문신에 새빨간 드레스 차림의 '타오르는' 적염의 머리칼에서 불티를 흩날리는 아름다운 여인, 전신에서 새파란 스파크를 튀기는 타이트한 해적 복장의 사내, 칠 척 장신의 거구에 검은 망토를 두르고 공중에 둥둥 뜬 십수 자루의 흑색 검들에게 호위받듯 당당히 선 대머리의 흑인검사, 인간형태의 기계위에 앉아 오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있는, 새하얀 백발에 싸늘한 눈동자를 가진 소년까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유명인들의 상징이 한데 모여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그 이름들을 입밖에 내지 못했다. 그들이 떠올린 이름은 천 년 전의 전설이었기에.

열 나라의 병사 삼천 명을 한 자리에서 불태운 용신자 '부활한 순수' 엘레오놀, 뇌운(雷雲)을 불러 오백의 기사를 일격에 살해한 용신자 '우레폭풍' 머로더, 야자크 초원의 전사 일천 명을 홀로 대적하여 삼 일 동안 근처의 호수를 붉게 물들인 용신자 '모탈 다크블레이드' C.아인, 테랑드 아카데미의 촉망받는 공학자였으나 용신자임이 밝혀지고 살인기계의 대부가 되어 육천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용신자 '마이스터' 슈.

하나같이 악명높은 전설을 갖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안녕하신가요, 비루한 인간 여러분?"

엘레오놀이었다. 그녀는 한 쪽 무릎을 굽히며 오래된 예법으로 드렉의 집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인사하고는 고개를 들며 방긋 웃었다.

"곧 용이 부활할 것이랍니다. 여러분은 용의 재림을 처음으로 보고 이 세상에 전하게 될 영광을 갖게 될 거에요. 자 박수."

짝짝짝

박수를 친 이는 엘레오놀 뿐이었다. 호응을, 심지어 동료들로부터도 받지 못했는데도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때였다.

짝짝짝짝짝짝!

방의 한 구석에서 요란한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어느샌가 한손엔 술병까지 들고 병째로 들이키던 랜더슨이었다.

"크, 크크크크. '진짜' 용의 알이 나타났다는 소릴 듣고 나타난거요? 내 친구를 잡아먹은 저 빌어먹을 알에 대한 이야기를! 드렉은, 내 친구 드렉은 뭐요? 지상에 다시 강림할 용의 제물이 되어버린 거냔 말이오!"

그의 무례한 외침에 사람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하지만 엘레오놀은 분노한 얼굴로 노호하지도, '불타오르지도' 않았다.

엘레오놀은 랜더슨을 깨끗하게 무시했다.

"슈, 예언된 시각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2분 22초. 헌데 역시 '그 분'께서는 오시지 않을 모양이군."

"용의 귀환을 누구보다도 바라마지 않으셨던 분이지만 정작 본인이 용이 되는걸 원하진 않으셨으니까요. '그 분'과 함께 용의 시대를 같이 열었으면 좋으련만."

"그, '그 분' 이라니? 또 누가 온단 말이오? 아아, 설마 아직 나타나지 않은 전설의 용신자 '더 리퍼'가……."

랜더슨의 무례한 언사에도 지워지지 않았던 엘레오놀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방금의 말을 꺼낸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전신이 불타오르는 것을 본 사람들의 얼굴색이 다시 한 번 창백하게 변했다.

"감히, 감히 '그 분'을 멍청한 반쪽짜리 잭에 비교한단 말이냐! 죽는 것이 두려워 영광을 포기하고 용의 귀환을 천 년 이나 미루게 한 잭 따위에! 잘 들어라 비루한 인간이여! '그 분'은 최초의 용신자이며 용이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셨다. 여기저기 해진 낡은 망토 하나와 이 나간 대검 한 자루가 가진 것의 전부였으나 전 대륙을 걸으며 용신을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천 년 전에 사라졌던 용의 이름이 다시 대륙을 휩쓸었겠느냐! 마도는 아니었고 마왕의 저주 이후로 사라진 마법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 한 사람의 신념이, '그 분'의 믿음이 용을 돌아오게 하셨다! '죽지 않은 자'인 우리와 달리 '죽지 않는 자'인 '그 분'께서! 목에 차가운 칼날이 박혔던 것이 마흔두 번, 심장을 베인 것이 쉰 번, 육체에 박힌 흉탄은 셀 수 조차 없다. 끓어오르는 열사의 사막도, 영혼마저 얼어붙는 냉혹의 빙원도 그 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었다. 루엘게덴나 전부가 죽이려 하였으나 죽이지 못한 자, 용의 씨앗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신 분, 최초의 용신자 '불사공' 둔저! 이것이 '그 분'의 이름이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불타오르던 엘레오놀은 솟구치는 불길을 잠재우며 손을 치켜세웠다.

"시간이 되었다."

구석에 선 채 침묵을 지키던 흑인검사, '모탈 다크블레이드' C.아인이었다.

"용이 돌아왔다."

메카닉 소년, '마이스터' 슈가 화답했다.

"천 년 만에 심어진 여섯번째 용종(龍種)이여, 깨어나라!"

해적 사내, '우레폭풍' 머로더의 외침이 끝난 순간 여전히 드렉의 머리맡에 놓여있던 알이 크게 맥동했다.

챠르륵- 쿠드드드드드드득!

비늘들이 요동치며 비늘덮인 팔이 펼쳐졌다. 콰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리가 뻗어나와 일어서며 동공이 세로로 쪼개진 비늘덮인 짐승의 눈동자를 지닌 머리가 솟아나왔다.

그리고 비늘이 사라지고 드렉이 나타났다.

"……드렉?"

독한 럼 한 병을 비운 랜더슨은 자신이 취했다고 생각했다. 알에서 나타난 것이 드렉이라니! 드렉은 저 앞에 머리가 날아간 시체가 되어 있지 않던가! 하지만 그는 완벽한 드렉이었다. 왼눈의 씰룩임에 따라 흉터가 뱀처럼 꿈틀거리는 이십년지기가 틀림없었다.

"오랜만일세, 친구여."

알에서 깨어난 드렉은 만취한 랜더슨을 향해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하곤 몸을 돌렸다. 그의 천 년 선배들이 요염한, 난폭한, 익살스런,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여섯번째 용자(龍子) '용안의 사수' 드렉이라 하오."

용신자들은 일제히 하늘로 손을 뻗었다.

쿠콰콰콰콰쾅!

용솟음치는 불꽃이, 광폭한 뇌격이, 노호하는 검의 폭풍이, 백색 살인기계의 주먹이, 작렬하는 탄환의 세례가 어울리며 반쯤 무너진 천장을 박살내고 집을 무너뜨렸다.

엘레오놀이 외쳤다.

"보라! 이천 년 만의 귀환이다!"

그녀의 눈은 트라이-아카르 평원 너머의, 가시산맥을 향하고 있었다.

변화는 없었다.

수 분이 지났다.

여전히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다.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어이 저기, 산맥이 움직이는 거 같지 않아?"

"너도 취했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 어어어?"

산맥이 솟아나고 있었다. 가시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꿈틀거리며 자라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눈을 비볐다. 그 사이 봉우리는 더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산맥 전체가 일렁이며 솟아올랐다. 검은 물감으로 휘갈겨 그려진 수묵화처럼 보이던 가시산맥에 다시 대가(大家)의 먹이 덧칠되는 것처럼 산맥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그 것'이 산이 아님을 깨달았다.

"용이다."

한 사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 말에 답하듯, 여기저기서 숨죽인 속삭임이 울린다. '용이다.' , '용이야.', '용이잖아.'

'그 것'은 용이었다.

'그 것'은 - 밤의 빛깔을 닮은 용은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그러나 실감나지 않는 실재로 그곳에 나타나고 있었다.

도무지 말도 안되는 거대함이다.

그 머리는 성채만 하고 몸집은 가시산맥을 이루는 산 십수개는 떼어다 붙인 듯 하다. 성채와 산맥을 잇는 목은 기마병 일개 중대가 하루종일 달릴 수 있을 만큼 길었으며, 경망스럽게 홰치지 않고 고요히 펼쳐진 두 날개는 트라이-아카르 평야를 모두 덮을 정도였다.

아웃포스트는 침묵했다.

용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가득 메우면서 그 거체가 솟아오르나, 여전히 그 꼬리는 보이지도 않았다. 용은 그렇게 갑작스레, 그러나 느릿하게 낮 위에 밤을 강림시키고 있었다.

용은 느릿하게 날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트라이-아카르 평야의 너비를 생각할 때, 용이 다가오는 속도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처음 산맥이 들썩이기 시작한 지 이십 분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야 용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태양이 남중하는 한낮이었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태양광이 용의 정면에서 작렬했다. 용의 전신을 덮은 새까만 비늘들이 요사스럽게 빛난다. 그리고, 용이 말했다.

<b><font>"나의 아이들아."</font></b>

랜더슨은 그의 멍청한 벗에게 정신나간 알을 팔았던 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용을 절대로 믿으며 그 믿음을 위해 전재산과 그 목숨마저 바칠 자를 그 누가 있어 헤아릴 수 있을까. 그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면.

피와 눈물, 럼으로 범벅된 랜더슨의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덫에 걸린 여우같은, 캑캑거리는 웃음소리였다. 드렉은 잠시 고개를 돌려 친우를 향해 미소지었다.

용신자들은 날아올랐다.

'부활한 순수' 엘레오놀은 아름다운 붉은빛 비늘과 불꽃의 날개를 가진 화룡(火龍)이 되었다.
'우레폭풍' 머로더는 시퍼런 번개의 날개를 번뜩이며 구름 사이를 누비는 뇌룡(雷龍)이 되었다.
'모탈 다크블레이드' C.아인은 어둠속을 질주하고 그림자 위에서 걷는 흑룡(黑龍)이 되었다.
'마이스터' 슈는 불꽃과 굉음을 토해내며 가장 빠르게 비행하는 기계룡(機械龍)이 되었다.
'용안의 사수' 드렉은 가장 높이 날아 가장 멀리 보는 비룡(飛龍)이 되었다.

다섯 용은 우아하게, 까불거리며, 요요하게, 거칠게, 고요하게 비행하며, 산맥을 넘어 나타난 '암흑성좌의 용'을 따라 사라져갔다.

수만 년 동안 이어질 '용의 시대'의 개막이었다.

*

느지막한 오후, '이블스 혼'에는 넋나간 표정의 사냥꾼들이 넋나간 표정의 주인장이 주는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쳐다보는 이가 없었다.

막 나타난 자는 팔 척 장신의 거한이었다.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짓다가 빈 자리를 찾아 의자에 걸터앉았다.

랜더슨은 비워버린 잔을 내려놓은 뒤,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사내를 슬쩍 훑어봤다. 너덜너덜하다시피 해지고 먼지가 잔뜩 앉은 망토가 보였고 펄럭이는 망토 사이로 허리에 찬 검이 드러났다. 노련한 모험가이며 숙련된 전사로 보이는 사내였다. 사내가 물었다.

"용을 보았는가."

랜더슨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랜더슨이 답했다.

"보았소."

사내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랜더슨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사내가 대답했다.

"평생에 걸쳐 용이 돌아오길 바랐고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룬 사내라네."

랜더슨은 다시 킬킬대며 웃었다. 한참을 웃던 그가 머리를 들자 낯선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랜더슨은 어느샌가 다시 채워진 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돌아온 용을 위하여, 건배."

Fin.

*

커그(www.fancug.com) 둔저제 당시 썼던 글입니다.


용신자(龍信者) 上 by 제녹

드렉은 용신자(龍信者)였다.

'용신자'는 대개 종말론자와 비슷한 어감으로 불린다. 약간의 혐오감과 경멸감, 그리고 조소를 담아 이렇게

'용 - 신 - 자 -'

오히려 용신자가 받는 비웃음이 종말론자가 받는 그것보다 더할 것이다. 종말이야 언젠가 - 당신들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 손자의 대 쯤에라도 - 올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용은 당신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 할아버지가 당신의 아들보다도 어렸을 적에 사멸한 존재였다.

최후의 용으로 알려진 '환마룡(幻魔龍)' 아르나엘이 저 영광된 신창, 팰러딘 라이안 홀리랜스에 의해 쓰러진 것이 이천 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루엘게덴나에서 용이 목격된 사례는 신화, 전설, 그리고 역사 - 물론 정사와 야사를 통틀어 일컫는 것이다 -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용신자가 나타났다.
마지막 드래곤 슬레이어의 업적이 세워지고 일천 년 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에 한 마을에 낡은 망토를 걸치고 대검을 찬 사내가 나타나 물었다.
'용을 보았는가.'
사람들은 노련한 모험가이며 숙련된 전사로 보이는 그에게 호기심과 선망을 느끼는 아이들을 단속하며 대답했다.
'아니오.'
사내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떠났다.
그리고 시나브로 용신자들이 나타났다. 대륙 각지의 마을에서 푸줏간집 아들이, 잡화점 딸내미가, 농사짓던 청년이, 베 짜던 처녀가, 귀족가문의 말괄량이 아가씨가, 모험가를 꿈꾸던 수줍은 소년이, 편지 한 장 달랑 남겨놓고는 등엔 낡은 망토를 두르고, 허리엔 한 자루 검을 매단 채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대륙 각지에 나타난 그들이 물었다.
'용을 보았는가.'

마른 들풀에 옮겨붙은 불길처럼 용신이 퍼져나갔다. 그들은 한결같았다.
'용을 보았는가.'
때론 점잖게, 때론 웃으며, 때론 과격하게, 때론 작렬하는 유성처럼 노호하며
'용을 보았는가.'

바야흐로 용신의 시대였다. 광신(狂信)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그들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같았다. 용신자들은 거칠고 무례했으며 포악했다. 문제가 생기면 주먹보단 검으로 해결하려 들었으며 머리를 쓰는건 박치기할 때 뿐이요, 입을 쓰는건 물어뜯기 위함이었다.

시비와 멱살잡이,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마왕강림' 이후로 수십개의 크고작은 나라들로 갈라진 이후 한 번도 통일된 적이 없었던 루엘게덴나 전역이 용신을 앓았다. 그리고 열린 것이 가장 강대했던 스물두 나라의 통치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테랑드 국제회의'였다. 그들은 입을 모아 용신자들의 패악을 규탄했고 마침내 '용신불가조약'에 서명했다.

'용신불가조약'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1. 용신을 언급하는 것을 금한다.]
[2. 용의 목격에 대해 묻는 것을 금한다.]
[3. 1,2항을 위반하는 자는 신분을 묻지 않고 3급 범법자로 구속한다. 이는 '에른스트 조약'에 구애받는다.]
[4. 3항에 해당되며 무기를 소지한 자는 2급 범법자로 구속한다. 이는 '에른스트 조약'에 구애받는다.]
[5. 4항에 해당되며 무기소지허가증을 소지하지 아니한 자는 1급 범법자로 구속한다. 이는 '에른스트 조약'에 구애받지 아니한다.]
[6. 5항에 해당되며 폭력행위에 가담한 자는 0급 범법자로 즉결처형을 허가한다. 이는 '에른스트 조약'에 구애받지 아니한다.]

용신자들은 대부분 6항에 해당되는 이들이었다.

살육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매일같이 총성과 비명이 울렸다. 용신자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혈향과 화약냄새에 익숙해질 무렵이 되자 용신자는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을 뿐, 용신자는 여전히 존재했다.

살아남은 용신자의 첫번째 부류는 독서광이 되었다. 대륙의 어느 도서관에서나 전혀 학자로 보이지 않는 이들이 두꺼운 역사서와 신화서, 심지어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까지 쌓아놓고 정독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의 역사로만 헤아려도 수천 년이다. '최초의 용' 비스트 부터 '태양휘룡' 헬-아벤리암, '은월성룡' 옌-아킴므, '암흑성좌의 용' 데스데모나… 그리고 최후의 용 '환마룡' 아르나엘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남긴 용의 수가 수백, 이름없이 전설이나 설화, 동화책에 스쳐가듯 나오는 한 장면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민담의 한 구절에 등장하는 수는 셀 수 조차 없다.
독서광이 된 용신자들은 그 모든 것을 파고들었다. 이 나라의 도서관에서 저 나라의 도서관으로, 저 나라의 도서관에서 그 나라의 도서관으로, 아침은 아무개 마을에서 용에게 시집간 소녀의 전설을 들으며 먹고 저녁은 개무아 마을에서 용에게 복수한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먹었다.
당신이 아는 - 그러니까 역사나 신화따위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당신조차 아는 - 역사학자나 신화학자의 상당수가 용신자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죽지않은' 용신자의 두번째 부류는 극소수였다. 그들은 용신자 중에서도 특히 흉험하고 포악한 자들이었다. 저 유명한 '더 리퍼' 잭 같은 이가 이 두번째 부류였다.
감이 오는가?
그들은 죽지 않았다. 죽일 수가 없었다. 일만 이천의 병사를 맨손으로 찢어발기고 유유히 도주한 '더 리퍼' 잭, 삼천 명을 불태운 '부활한 순수' 엘레오놀, 뇌격을 불러 오백의 기사를 살해한 '우레폭풍' 머로더… 하나같이 그 명성이 대륙을 공포로 떨게 한 이름들이다.

그리고 '테랑드 국제회의'로부터도 천 년이 지났다. '용신불가조약'에 서명했던 스물두 개의 국가 중 남은 것은 둘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신생국들의 기세에 밀려 스러져가고 있었다.

용신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과 같은 열기와 광증은 사라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강대했던 이십 개의 나라가 사라지고 두 나라가 쓰러져가는 동안에도 용신자들은 대륙을 떠돌며 용을 묻고 용신을 전염시켰다.

그러나 '더 리퍼'의 공포도 천 년 전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천 년 이라는 시간은 그 무게로 국가를 무너뜨릴 만큼 무거웠으나 또한 공포를 희석시키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다. '용신불가조약'을 기억하는 용신자들은 더이상 무례하지도, 포악하지도 못했다. '용신자'에서 느껴지던 혐오와 경멸, 공포 중에서 공포가 사라졌다. 공포가 사라진 혐오와 경멸은 그 형제인 비웃음을 불렀다. 그래서 '용신자'를 부를때는 보통 이렇게 부른다. 혐오와 경멸, 그리고 조소를 담아

'용 - 신 - 자 -'

*

아웃포스트의 사냥꾼 '용안(龍眼)의 사수' 드렉은 용신자였다. 그러나 그가 타인들로부터 받는 시선은 다 해진 망토를 걸치고 마을에 불쑥 찾아와 '용을 보았는가.' 하고 묻는 떠돌이 용신자들이 받는 그것과는 달랐다. 아웃포스트는 '이차 흑룡대전'과 '마왕강림' 이후로 루인드랜드로부터 가시산맥을 넘어오는 마물들을 대적하는 최전선이었고 이곳에서 사냥을 생업으로 삼은 이들은 강맹하고 현명했다.
드렉은 그런 아웃포스트에서 이름대신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인정받는 사냥꾼이었으며 그 성격은 호탕했고 남의 요청을 거절할 줄 몰랐다. 수입의 반을 용의 탐구와 그 존재를 입증할 증거의 조사에 쏟아붓는 것만 제외한다면 오히려 평균이상으로 건실하고 인정있는 청년이었다. 그랬기에 드렉은 단순히 '서른둘의 나이에도 철이 덜든 괴짜'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오후 늦은 시간, 사냥꾼들이 주로 모이는 주점 '이블스 혼(Evil's Horn)'에서 맥주를 들이키던 이들은 잔뜩 흥분한 드렉이 웬 큼지막한 자루를 들고 나타난 것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는 이전에도 틀림없는 용의 실존의 증거라며 이것저것 괴상한 물건들을 갖고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드렉의 친우이며, 벗의 괴상한 믿음에 동의하진 않지만 그 사실이 돈독한 우정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랜더슨은 의문을 가졌다. 들고 온 자루를 랜더슨이 앉은 테이블 위에 턱 올려놓은 드렉이 그의 양 어깨를 양 손으로 잡고 마구 흔들어대서야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랜더슨! 랜더슨! 찾았다! 드디어 찾아냈다고! 이 내가, '용안의 사수' 드렉이 찾아냈단 말이다! 하하하하하하하! 너희 불신자들이 내 믿음을 비웃으며 그런 별명을 지어 부를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겠지? 너흰 틀렸어! 내가 옳았다고!"

"뭐야, 네놈 또 약했냐?"

삼 년 전에 '용이 되는 약' 이라며 수상쩍은 병에 담긴 정체불명의 액체를 금화 세 닢이나 주고 사서 마신 드렉이 삼 일 밤낮동안 반미치광이가 되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는 랜더슨은 떫은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을 차린 후 꼬박 칠 일을 앓아누운 드렉이야 자업자득이라 쳐도 당시 랜더슨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라차림으로 집밖을 향해 뛰쳐나가려는 장정을 말리는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다행히도 드렉은 허리띠를 풀고 옷을 벗어제끼는 대신 한 손을 뻗어 그가 가져온 자루를 가리켰다.

"하하하! 랜더슨, 이 자식아. 용이, 용이 없다고? 이번엔 확실한 증거를 찾아왔다! 용은 실재한다고! 하하하하핫!"

랜더슨은 어깨를 짚은 드렉의 나머지 한 손을 떼어내며 얕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벼락맞아 뒈질 자식아, 네놈이 '확실한 증거'라고 미쳐 날뛰며 요상한 잡동사니를 예쁘게 포장해온게 하루이틀이냐? 그래서 이번엔 뭔데?"

"이번엔 달라.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완벽한 증거라고!"

"내가 '이번엔 달라.', '완벽한 증거'란 말을 들은게 이걸로 예순번째다. 흰소리 그만 늘어놓고 어서 까기나 해봐."

드렉은 한쪽 눈을 씰룩였다. '용신자'라는 점과 그의 출중한 사격술에 더불어 '용안의 사수'라는 별명을 갖게 해준, 왼쪽 눈의 위아래로 길게 그어진 흉터가 꿈틀거렸다. 드렉이 사냥감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보여주는 습관이었다.

"하하하, 놀라 까무러치지나 말라고!"

드렉은 단숨에 자루의 입구를 묶은 끈을 풀고 그 속에 들어있던 것을 꺼냈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반아름쯤 되는 투박하게 생긴 나무상자였다. 한 자 가량의 높이로 잘라낸 갈참나무의 겉을 대충 손질하고 속을 파낸 후 뚜껑을 달아놓은 것이었는데, 어느모로 봐도 마법이나 신비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 까무러치겠군. 이 벌레도 안먹을 후줄근한 통나무는 뭐, '세계수의 마지막 파편'쯤 되는거냐?"

삼천 년 전의 전설을 인용한 랜더슨의 말에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키들거렸다. 드렉은 랜더슨을 향해 한 손가락을 편 주먹을 들어보이는 굉장히 모욕적인 몸짓을 하며 뚜껑의 손잡이를 잡았다.

"흥, 마음껏 웃어보라고. 뭐든 겉모습보다 그 내용물이 중요한거 아니겠냐? 잘 보게나 친구여."

뚜껑이 열렸다.

랜더슨과, 어느새 그의 테이블을 둘러싼 사냥꾼들의 시선이 상자의 안쪽을 향했다. 그 시선에 끝에는 알이 있었다. 아니, '알처럼 보이는 어떤 것'이 있었다. 누구도 그렇게 크고, 형형색색으로 번뜩이는 비늘덮인 알은 본 적이 없었다.

기묘한 알이었다. 드렉의 나무상자는 그다지 큰 것이 아니었지만, 계란이 삼백 개 쯤은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였다. 알은 그 상자를 가득 메운 채 붉게, 푸르게, 검게, 희게, 선명하게, 칙칙하게, 밟게, 어둡게, 일렁이며, 잔잔하게 빛나는 비늘들로 덮여 있었다.

관중은 침묵했다. 동시에 그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알이라니!', '맙소사, 저게 알이라고?', '알? 우리집 암탉이 매일 낳는 그것과 '저 것'이 그런 이름을 공유할리가 없어!'

"남쪽의 아쟈크 초원에 오스, 오스트…? 뭐 그런 이름이 커다란 새가 있는데 혹시 그 새의 알이 아닌가? 사람키만 한 새인데 그러면 알이 사람 머리통보다 커도 이상할리 없지 않나."

왕년에 테랑드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노사냥꾼 '닥터 헌터' 훔볼트였다. 그의 말에 사냥꾼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그러나 야자크 출신의 전사이며 한 자루 창만 들면 쓰러뜨리지 못할 짐승 - 물론, 인간은 짐승이다. 당신은 아니라 주장하겠지만 - 이 없다는 '무적창' 퀜타르의 나직한 음성에 그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오스트리치(Ostrich ; 타조)요. 그리고 이건 그 새의 알이 아니오. 오스트리치의 알은 아무리 커봐야 이것의 절반도 안돼. 십 년이나 대륙을 돌아다녔지만 이런 알은 처음 보는군. 정말로 용의 알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침묵.

"하하, 들었냐! 저 '무적창'마저 처음본단 얘기? 아무렴말고, 세상의 비밀을 모두 깨우친 것 같은 신비한 마법사에게 금화 여든 닢이나 주고 산 건데 용의 알이 틀림없……."

침묵을 깨고 이블스 혼의 홀을 울리던 드렉은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랜더슨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드렉의 멱살을 잡아챈 것이다. 유능한 사냥꾼이 된 사실에서 알 수 있는대로 매사에 신중한 성격이지만 용에 관련해서라면 말오줌과 맥주도 못가리는 친구를 향해 '스톰 애로우' 랜더슨은 폭풍처럼 말을 쏟아냈다.

"야, 이 용에 환장한 미친놈. 네놈이 언젠가 사고칠 줄 알았어! 여든 닢? 금화 여든 니이잎? 그거 혼사 치루고 새끼들 기를때 쓴다고 모아둔 네놈 전재산 아니냐! 그걸 이딴 정신병걸린 알 따윌 사는데 몽창 쏟아부어? 그리고, 뭐? 마법사? 이 얼빠진 녀석아. 마(魔)에 법칙(法則)은 없어. 다만 마도(魔道)를 걷는 미치광이들이 있을 뿐이다. 네놈의 선배격이니 잘 알 것 아니냐, 마도사 '부활한 순수'와 '우레폭풍'의 이야기를?  감히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할 '칠흑의 마왕'이 강림한 이후로 이 세상에서 마법은 사라지고 마도만이 남았단 말이다! 그 작자가 자신을 마법사라고 소개했다면 틀림없이 사기꾼이고 그저 풍기는 분위기로 네가 그를 마법사라 여긴 거라면 완벽한 사기꾼이다! 분명 어디서 커다란 가짜 알을 주워다가 비늘 예쁘게 붙이고 사이한 마술을 걸어서 만만해보이는 용신자에게 팔아먹으려고 한 거겠지. 그거 사자마자 이리로 달려왔지? 뻔하다 뻔해. 그럼 그 사기꾼놈 멀리 가진 못했을거다. 당장 쫓아가서 마음이 바뀌었으니 돈 돌려달라고 해!"

드렉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랜더슨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다시 주먹을 흔들며 모욕적인 몸짓을 하더니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그래그래, 네 말 다 맞다. 그런데 이몸이 곧 '부활한 용'의 의부(義父)가 될텐데 그깟 결혼이 대수냐. 그리고 그 마법사라면 금화를 받자마자 뿅 하고 사라졌으니 발자국도 없고 냄새도 없는데 어찌 쫓아간단 말이냐."

드렉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표정을 풀고 하하 웃으며 다시 자루에 상자를 넣곤 입구를 조여서 묶었다.

"뭐 되었다. 네가 용을 믿지 않은게 어디 하루이틀이냐. 네가 그러는 것처럼 나도 네가 내 믿음을 부정한다 해서 널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나중에 내가 또 속았던 거라면 사과할테니 위로의 뜻으로 술이나 한 잔 거하게 사 다오."

랜더슨은 용의 알이 든 상자를 넣은 자루를 어깨에 메고 주점을 나가는 드렉을 맥빠진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랜더슨의 어깨를 몇몇 사냥꾼들이 두드렸다.

"자네가 이해하게나. 가끔 저러긴 해도 저만큼 사람좋은 녀석도 드물지 않은가. 뭐… 금을 여든 닢이나 쓴 건 좀 과하긴 했네만. 끙, 나중에 드렉과 술먹을 일 있을때 나도 부르게나. 많이는 안되겠지만 나도 보태겠네."

"나도 도와주지. 수입의 반절을 용 꽁무니 찾는데 바치면서도 금화를 여든 닢이나 쌓아뒀었다니. 드렉 저 친구 의외로 알뜰했나보군."

"고맙소. 훔볼트, 그리고 퀜타르. 그나저나 이 일로 크게 충격좀 받고 용신을 그만두게 되면 좋으련만, 후우."

*

그 날 이후로 드렉은 나흘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랜더슨이나 다른 친구들이 찾아가서 문을 두드려도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돌아가라고 할 뿐이었다. 그리고 랜더슨은 드렉이 은둔한지 오 일째가 되는 아침에 문을 요란하게 두들기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쾅쾅쾅쿠왕쾅쾅쾅쾅!

"제기랄! 어느 정신나간 작자가 마왕도 쉬는 월요일 아침에 문을 이리 부숴져라 두드리는 거요!"

랜더슨은 문짝을 뜯어낼 기세로 열며 짜증을 내다가 방문자가 그 자신이 나흘동안 얼굴을 보려했지만 실패한 인물이란걸 알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염이 거뭇하게 얼굴을 뒤덮었고 감지않은 머리에선 기름이 번들거렸지만 이십년지우의 얼굴도 못알아보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드렉? 드렉이냐? 대체 나흘이나 집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뭘 하고 있었던거야?"

드렉은 대답대신 히죽 웃으며 집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에서 흰 가루가 흩날렸지만 랜더슨은 그것보다 드렉의 어깨에 걸쳐진 자루에 더 눈길이 갔다.

'내가 잠이 덜깬건가? 어째 지난번보다 자루가 커진 느낌인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랜더슨은 드렉이 자루를 풀고 그 속에서 꺼낸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드렉이 투박한 통나무상자 대신에 예의 알을 꺼낸 것이다. 랜더슨은 그 알의 부피가 이전보다 세 배는 되어보이는 데다가 알이 맥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게 지난 번의 그 '알'이냐?"

"물론이지! 그럼 이게 뭐겠냐. 봐, 보라구. 넌 이미 산란된 알이 '숨쉬고 성장하는'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냐? 물론 넌 여전히 '사이한 마술'이라 생각하겠지만, 이건 분명 용의 알이 틀림없어. 낄낄, 아무래도 네 술 얻어먹긴 힘들겠다."

드렉은 랜더슨의 등등 탁탁 치며 웃었다. 랜더슨은 꿈틀거리는 알을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게 자라기 시작한거냐?"

"가져온 다음날 자고 일어나보니까 상자에 금이 가 있었다. 놀라서 열어보니까 알이 꽉 차 있더라구. 그리고 어젯밤부터 숨쉬는 것처럼 이리 꿈틀거리더라. 네게 제일 먼저 보여주는 거니까 영광으로 알아."

드렉은 흥분으로 눈을 계속 씰룩이고 있었다. 그의 흉터가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랜더슨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치겠군. 내 믿음이 흔들리는 것 같아. 어이, 드렉. 저거 어서 가지고 돌아가라. 나는 네가 말하는 '불신자'지만 이 아웃포스트 근처의 용신자들의 귀에 네가 '숨쉬고 성장하는 용의 알'을 가지고 있단 소문이 들어가면 용신자 도적단이 탄생할지도 모르니 함부로 밖에 들고다니지도 말고. 나한테 가장 먼저 보여줬다니 아직 나 말고는 이걸 아는 사람도 없을테니 다행이네."

"하기야 그렇군. 음, 충고 고맙다. 이만 돌아가지."

"우리사이에 고맙단 말은 무슨. 용이 태어나면 얘기나 해라. 그땐 축하주를 한 잔 사주마, 클클."

"믿지도 않으면서 말은 잘하는군. 임마, 넌 친구 잘둬서 용의 의숙이 될거란 말이다. 기대하고 있으라구."

드렉은 그렇게 말하며 이미 열려있던 문으로 나갔다. 랜더슨은 여명을 등져 실루엣으로 보이는 드렉을 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고맙구만. 조심해서 들어가라. 그런데 너, 어째 좀 마른 것 같다?"

"글쎄, 너무 흥분해서 끼니도 제대로 안챙겨서 그럴걸. 돌아가서 한 상 거하게 차려먹고 늘어지게 잠이나 자야겠다."

"잘하는 짓이다. 난 못잔 잠이나 더 잘테니 날 친구로 생각한다면 이만 사라져다오."

"낄낄, 알았다."

드렉은 킥킥거리며 문을 닫았다.

*

다음 날 아침, 드렉의 집에서 총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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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註)

에른스트 조약 : 외국인 범법자에 대한 대우방식을 신분에 따라 차등화하여 맺은 조약

화폐 : 금화 한 닢은 대략 두 돈 반 (9.4g) 가량이며 우리돈으로 60~70만원 정도, 물론 아랫단위인 은화와 동화가 주(主) 통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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